닉스 수비게임의 변화.

디앤토니가 사임하고 우드슨이 감독직을 대행하면서 닉스가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은 수비게임이다.

뭐 디펜스를 가다듬고 연습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그 변화는 크지는 않고, 간단하다.

1. 퍼러미터디펜스에서 프레스를 한다.
2. 상대팀의 가드와 빅맨이 투맨게임을 시도할 경우, 하드쇼 또는 블릿츠로 대응한다.
3. 상대팀의 포워드와 포워드, 포워드와 센터가 스크린플레이를 할 경우 스위치로 대응한다.

디앤토니 감독시절 닉스의 투맨게임 디펜스는 대체로 소프트쇼였다.

아주 간단한 변화다. 그러나 이 세가지의 변화만으로 닉스의 수비는 발전했다. 일단 상대팀의 볼핸들러가 퍼러미터부근에서 드리블을 멈추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턴오버유발횟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게다가 스위치를 두려워하지 않는 수비를 구사하다보니 로테이션에 일단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미스매치로 인한 찬스를 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스위치를 두려워 않는 디펜스는 우드슨이 애틀랜타 시절 보여주었던 것인데, 단점이 있기는 해도 로테이션면에서는 강하다.

다만 닉스의 선수들이 하드쇼나 블릿츠에 대한 이해도가 아직 높지 않다보니 리커버리 하는 과정에서 어처구니 없는 오픈찬스를 내어주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또 스위치 후 다시 스위치로 디펜스매치업을 되돌리는 과정에서도 어처구니 없는 미스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비교하면 훨씬 나아진 모습이다. 앞으로가 기대된다.

by 나무그늘 | 2012/03/17 10:47 | NBA

료마가 간다 - 시바 료타로

10권짜리 역사소설이다. 손정의씨의 애독서로 유명한 책이며, 나 또한 손정의씨 때문에 접하게 되었다.

역사는 소설이라고 할 지라도 역사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이고 투철한 문체로 적혔다고 평가받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나 내전기 조차 카이사르의 당시의 역사를 바라보는 주관적 관점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당시 시바 료타로라는 사람이 과연 어떠한 역사관을 가지고 글을 썼는지를 한번 되새김질 해봐야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사카모토 료마라고 하는 인물은 시바 료타로의 이 소설, '료마가 간다'로 재창조되었다는 견해가 심지어 일본에서도 재기되고 있는 형편이니 만큼, 그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라 하겠다.

시바 료타로가 작가로서 왕성히 활동을 하던 시절은 패전의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경제부흥을 일구던 때다. 당시 사카모토 료마 뿐 아니라 노구찌 히데요, 역사소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본은 과거 역사의 영웅들에 대한 재조명이 한창 붐을 이루었다.

왜일까. 패전국에 전범국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쓰고, 절망과 실의, 열등감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나 많은 영웅들이 살아숨쉬는 훌륭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열등감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미래를 보고 노력하자.....특히 일왕에 충성하는 것을 최대의 가치로 감아왔던 일본인들은 그 가치관이 깨지면서 일종의 가치관 상실에 빠져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료마가 간다를 읽어보면 '사심을 버리고 일본 전체를 위해 봉사한다'는 일종의 국가주의적 가치관이 지속적으로 눈에 띄는데, 이러한 가치관을 주입함으로서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역사를 재조명, 특히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영웅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역사소설들이 나오게 된 데에는 이러한 뒷배경이 있다.



료마가 간다를 읽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한국에는 왜 이런 훌륭한 인물이 없었을까' 다.

정말 한국에는 훌륭한 인물이 없었을까. 한국에도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통칭 개화파로 불리는 일련의 깨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그들이 가진 신념이나 의지, 식견은 사카모토 료마나 일본 유신지사들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개혁에 성공하고 한국은 실패했을까.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당시 권력이 여러갈래 나뉘어져 있었던 데에 비해 한국은 조선왕조라는 중앙집권국가였기 때문이다. 천황이라는 실권은 없지만 명분을 제공해줄 수 있는 세력과, 쵸슈와 사츠마라는 군사력과 재력...이렇게 막부에 대립해도 실력으로 뒤떨어지지 않는 강한 세력들이 존재했기에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조선은 왕조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개혁을 하려고 해도 그 개혁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힘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단순히 일본에 더 훌륭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단 하나의 인물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 인물이 아무리 훌륭한 식견과 실력과 의지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뒤따라주는 실질적인 힘(그것은 때로는 민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재력 또는 권력이기도 하다.)이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이나 전태일 분신자살 등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전태일 분신자살 이후 곧바로 한국의 노동운동이 활기를 띈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경공업 위주 경제 하에서 노동운동은 대체로 여자직공들이 주를 이뤘고 그들은 힘이 없었다. 10년 후 한국이 본격적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 비로소 남자직공들이 노동운동에 가담하면서 그 때부터 한국의 노동운동은 활기를 띄었던 것이다.

료마가 간다라는 이 소설 하나를 읽고 한국에 훌륭한 인물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에도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건 시도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하지도 못한 채 일본에만 훌륭한 인물이 있었던 것처럼 한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과연 목숨걸고 노력하고 있냐고. 자신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이미 죽어간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할 일이다.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사카모토 료마는 상당히 미화되어 있다. 특히 료마가 자신의 생각과 세계관을 서술하는 듯한 부분은 절반 이상이 작가 자신의 생각이다. 실제 료마는 어떤 저술활동도 한 적이 없고, 그가 남긴 저술은 편지 몇 장이 전부다. 그나마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두서 없이 적는 버릇을 갖고 있어 그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추측해볼 수 밖에는 없다. 이 소설 속에서 작가는 료마라는 인물을 빌어 자기 자신의 세계관과 생각, 가치관을 여러번 설파하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자칫 료마라는 인물의 매력으로 인해 작가의 생각을 마냥 옳은 것처럼 받아들이게 될 수 있다. 이것을 주의하면 충분히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본의 영웅숭배사관에 동조하는 정도에서 그치게 될 것이다.

by 나무그늘 | 2012/03/15 14:09 | 수필/시 | 트랙백

린은 아마레와의 투맨게임을 더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닉스의 공격은 탑에서 린-챈들러의 투맨게임으로 시작한다. 챈들러의 스크린이 워낙 좋기에 린이 스페이스를 확보하면서 원드리블 이후 점퍼. 챈들러에게 이어지는 픽앤롤의 피니쉬는 드물다. 린이 슈팅스페이스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경우 아마레나 멜로에게 이어지면서 피니쉬로 가게 된다.

문제는 이 리듬을 이미 상대팀이 읽고 있다는데 있다.

아마레의 스크린셋타임은 챈들러의 그것에 비해 훨씬 짧다. 아마레는 잠깐 스크린셋을 한 이후 투맨게임파트너가 스크린을 타지 않을 경우 그대로 빠져서 픽앤슬립을 시도한다. 파트너가 스크린을 타는 경우에도 파트너의 스페이스 확보를 돕기 위해 스크린자세를 유지하는 것보다 빠른 박자로 빠져서 롤링하는 것을 택한다.

챈들러의 스크린셋타임은 긴 편이다. 사이즈가 좋기 때문에 상대팀가드가 알고도 스크린을 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해 투맨게임파트너는 챈들러의 커다랗고 긴 스크린을 활용해서 페네트레이션레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

챈들러나 아마레 모두 아주 좋은 스크리너이고, 픽앤롤 파트너로서 이보다 더 나은 빅맨은 드물다. 하지만 린으로서는 챈들러와의 투맨게임보다는 아마레와의 투맨게임을 더 자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지금 아마레와 멜로는 두번째, 세번째 옵션으로 밀려난 상태다.

오늘 게임의 스탯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린의 야투시도가 가장 많고, 아마레는 그 다음, 멜로는 37분간 고작 11개의 야투를 시도했을 뿐이다. 린의 손안에서 이미 10초 이상이 흐른다음 멜로나 아마레가 볼을 이어받는다. 10초 안밖의 적은 시간이 남은데다 멜로나 아마레가 볼을 잡으면 피니쉬가 온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상대팀 선수들은 수비포메이션을 좁히면서 노골적으로 더블팀과 트랩으로 대처한다. 당연히 아마레와 멜로는 터프샷을 시도하게 되고 이 둘의 슛팅리듬은 떨어진다.

오늘게임은 내내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린은 좋은 선수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할 무기가 없다. 점퍼가 정확하기는 하지만 터프샷을 연속으로 꽂아넣을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페인트존에서의 왼손레이업 피니쉬도 확실히 좋은 스킬이지만 샷컨테스트가 들어오면 정확도가 떨어진다.

결국 원포제션 상황이 되었을 때, 피니쉬는 멜로나 아마레가 맡아주어야 하는데, 린-챈들러의 투맨게임이 1옵션이다보니 이들은 경기내내 자신들의 슛팅리듬을 찾지를 못하고 있다.

린은 아마레와 투맨게임을 더 자주시도해야 한다. 아마레는 스크린셋타임도 짧고 롤링이 빠르기 때문에 패싱레인이 열리는 시간도 짧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잘만 이용하면 되려 챈들러와의 투맨게임보다 훨씬 파괴적인 효과를 낼 수가 있다. 또 아마레의 장점은, 캐칭능력이 극강이라 완벽한 패스를 꼭 해줘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충 로빙패스로 띄워서 넣어만 주어도 된다. 알아서 잡아내어 피니쉬를 해버리는 것이 아마레다. 일단 손발이 맞기 시작하면 챈들러보다 더 편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아마레-린이 투맨게임을 시도하면서 오프닝하고, 멜로-챈들러가 윅사이드에서 스크린플레이를 시도하는 것이 지금의 닉스로서는 최선의 게임플랜이라 생각한다. 린-아마레가 투맨게임을 하고 여의치 않으면 챈들러의 스크린셋을 타고 멜로가 프리로 나와서 볼을 이어받아 피니쉬 또는 롤링하는 챈들러-아마레에게 피딩패스. 이 리듬이 가장 좋다.

그리고 벤치타임에는 멜로나 아마레를 남기고 제이알과 토니 더글라스를 투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멜로가 4번 또는 아마레가 5번으로 가는 스몰라인업으로 런앤건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제이알이 퍼러미터게임에서 프리롤을 받으면 상대팀들의 벤치라인업으로는 막기 힘든 공격력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토니가 비록 주전경쟁에서 밀려 벤치로 내려간 이후 출전도 잘 못하고 있기는 하다. 올타임 1번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을지 몰라도 백업 포인트가드로서는 상당히 훌륭한 선수다. 특히 러닝게임에서 토니는 제법 위력있는 모습을 발휘하기 떄문에, 토니를 활용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물론 필즈, 셤퍼트도 아주 좋은 선수지만...토니도 그냥 썩혀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닉스의 라인업은 굉장히 좋다. 주전라인업 뿐만 아니라 노박, 제프리스, 제이알, 셤퍼트or필즈, 워커 등이 벤치에서 나온다는 점은 엄청난 메리트다. 지금 당장 이 멤버로 손발만 잘 맞춘다면 동부지구에서 4위 안에 드는 컨텐더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댄토니 감독의 게임플랜을 기대해본다.

by 나무그늘 | 2012/02/21 12:53 | NBA

자유시장은 있다? 없다?

자유시장은 있다? 없다?

먼저 자유주의 경제론에서 말하는 자유시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자유주의 경제론에서 말하는 자유시장이란 ideal market 이다. 소비자와 판매자의 진입과 퇴출이 자유롭고 그 수가 무한한 시장. 이 ideal market의 가정을 기초로 전개되는 과학이 자유주의 경제론이다. 정교한 수학적 모델이 난무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바로 이 ideal market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유주의 경제론자들에게 있어 이 이상적인 시장모델은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공준이기 때문이다. 이 가정이 무너지면 자유주의 경제론은 토대부터 흔들린다.

그들은 인정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시장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심지어 가장 이런 모델에 가까운 주식시장마저도 완전히 이 모델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현실의 시장을 최대한 이러한 이론적 모델에 가까운 시장으로 운영을 해야만 시장의 '효율성'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으며, 시장이 완전한 기능을 할 때에만이 최선의 과정과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상 정부개입의 '최소화'를 외친다. 아예 정부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없다. 그들도 완전경쟁시장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정부역할도 일정부분은 인정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될 수 있는한 줄여야 한다.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고, 정부의 역할과 개입은 무조건 줄이는 것 만이 최선의 선택이다. 왜? 시장보다 더 완벽한 시스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하준은 여기에 의문부호를 붙인다. 정부의 개입은 줄이는 것만이 최선인가? 과연 그렇다면 정부개입 '최소화'의 경계선은 어디쯤 그어야 한다는 것인가?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의 노동력도 상품이라면, 인신매매시장을 인정하는 것, 즉 노예제를 인정하는 것도 자유시장론을 위해서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을 매매할 수 있는 권리는 부정한다. 왜? 그런 권리를 바탕으로 시장이 형성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정부개입 '최소화'의 선긋기라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사회적 합의, 정치적 과정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개입 최소화는 이론적인 논의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 현실적인 정치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으며, 규제와 비규제라는 것은 항상 서로 상대적인 관점에 서있게 된다.

즉, 장하준의 제기하는 의문점은, '정치적 과정을 완전히 배제한 이론적인 설명만으로 정부개입 최소화의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송원근, 강성원의 책은 엉뚱하게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합목적적 정부개입은 자유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므로,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자유시장이 만일 정치적 과정을 배제하고서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정의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렇다. 정부개입은 자유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정부개입이 어느 정도까지 이뤄져야 자유시장인 것인가? 이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장은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주장하려면 그 논거로 정부개입이 어느 정도 선까지 용인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최소한의 정부개입이 자유시장의 기능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근거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논거제시는 죄다 건너 뛰어버린 채로 '우리도 인정하는데 뭐가 문제냐' 라는 결론명제만 내리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장하준의 논리를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주장을 하는 것은 제도학파의 논리이다. 시장을 완전히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장도 사회제도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부를 비롯하여 다양한 다른 사회제도들의 기능도 인정하자는 것이다. 많은 사회제도들이 서로 함께 기능한다는 가정하에 어디서 서로의 경계선을 그어주는 것이 그 사회를 위해 최선인지를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무조건 시장제도만이 최선의 시스템이라고 단언하지 말자는 것이다. 시장을 완전히 부정하자거나 정부개입은 언제나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제도들이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논의과정은 어느 사회에나 필요하다. 시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은 언제나 최선이고 완벽하니까 닥치고 시장시스템만을 따르자. 라는 주장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나는 이 경고메시지를 한번쯤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장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시장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시장의 실패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또 시장 외의 다른 제도들의 실패 또한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논의하고 합의해야 한다.

장하준의 논리를 반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하는 우는 장하준의 논리를 계획경제로 이해한다는 점에 있다. 장하준의 논리는 철저히 제도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시장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정부를 무조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정부든 시장이든 제도에 불과하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 무조건 우월하지도, 무조건 열등하지도 않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드러커 교수가 지적했듯이 모든 사회적 제도란 사회적 합의, 사회구성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성립되고 기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논의를 해야 한다. 어느 한 제도가 무조건 다른 모든 제도보다 더 우월하며 완벽하다고 단언할 것이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장하준이 말하고 싶은 것은, 소위 자유주의 경제정책가(경제학자가 아닌..)들이 말하는 가치판단기준, 정부개입은 무조건 최소화시켜야하고, 물가안정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고, 기업경영은 무조건 주주 부의 극대화라는 기준이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그러한 가정들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논리가 완전히,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의 저자들은 장하준의 논리가 '틀렸다'라고 선언하고 싶어한다. 그 선언을 위해서는 동문서답식 반론, 또는 논점을 비켜나간 반론도 서슴지 않고 있다.

장하준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하준의 논리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무지렁뱅이 경영학도이지만 장하준의 몇몇 논리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장하준의 의문부호들은 되새김질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왜 항상 사람들은 어떤 명제에 대해 틀리다거나 옳다는 정답오답판단을 내려야만 속이 시원한 걸까. 인간사회의 대부분의 명제들은 대체로 정답도 오답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인간에게 완벽은 없다. 단지 보다 나을 수 있을 뿐이다. (Human being can't be perfect. Human being can only be better.) 다만 끊임없는 회의와 비판, 반성적 사고만이 보다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장하준의 책은 충분하고도 넘치는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by 나무그늘 | 2011/11/21 16:49 | 경제 이슈

Grey's Anatomy 中....

S6E12...

I'm big, too big. I can't even fit into a seat in an airplain. When I get into a diner and if the food is overcooked, I get enraged. I want to kill that waiter. But I don't. I politly ask him to serve again. Everyday I try to make myself smaller, so that I could fit in. I could be more acceptable. But that's okay. Because when the night comes, when I am up to stage, I get to kill the waiter and I can dance on his grave. And if I can't do that no more, all I have to do is making me smaller for the rest of my life, then I don't want to live. And believe me honey, you do not want me to live.

by 나무그늘 | 2011/11/10 22:41 | 수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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