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은 있다? 없다?
먼저 자유주의 경제론에서 말하는 자유시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자유주의 경제론에서 말하는 자유시장이란 ideal market 이다. 소비자와 판매자의 진입과 퇴출이 자유롭고 그 수가 무한한 시장. 이 ideal market의 가정을 기초로 전개되는 과학이 자유주의 경제론이다. 정교한 수학적 모델이 난무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바로 이 ideal market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유주의 경제론자들에게 있어 이 이상적인 시장모델은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공준이기 때문이다. 이 가정이 무너지면 자유주의 경제론은 토대부터 흔들린다.
그들은 인정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시장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심지어 가장 이런 모델에 가까운 주식시장마저도 완전히 이 모델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현실의 시장을 최대한 이러한 이론적 모델에 가까운 시장으로 운영을 해야만 시장의 '효율성'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으며, 시장이 완전한 기능을 할 때에만이 최선의 과정과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상 정부개입의 '최소화'를 외친다. 아예 정부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없다. 그들도 완전경쟁시장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정부역할도 일정부분은 인정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될 수 있는한 줄여야 한다.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고, 정부의 역할과 개입은 무조건 줄이는 것 만이 최선의 선택이다. 왜? 시장보다 더 완벽한 시스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하준은 여기에 의문부호를 붙인다. 정부의 개입은 줄이는 것만이 최선인가? 과연 그렇다면 정부개입 '최소화'의 경계선은 어디쯤 그어야 한다는 것인가?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의 노동력도 상품이라면, 인신매매시장을 인정하는 것, 즉 노예제를 인정하는 것도 자유시장론을 위해서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을 매매할 수 있는 권리는 부정한다. 왜? 그런 권리를 바탕으로 시장이 형성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정부개입 '최소화'의 선긋기라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사회적 합의, 정치적 과정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개입 최소화는 이론적인 논의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 현실적인 정치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으며, 규제와 비규제라는 것은 항상 서로 상대적인 관점에 서있게 된다.
즉, 장하준의 제기하는 의문점은, '정치적 과정을 완전히 배제한 이론적인 설명만으로 정부개입 최소화의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송원근, 강성원의 책은 엉뚱하게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합목적적 정부개입은 자유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므로,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자유시장이 만일 정치적 과정을 배제하고서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정의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렇다. 정부개입은 자유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정부개입이 어느 정도까지 이뤄져야 자유시장인 것인가? 이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장은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주장하려면 그 논거로 정부개입이 어느 정도 선까지 용인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최소한의 정부개입이 자유시장의 기능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근거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논거제시는 죄다 건너 뛰어버린 채로 '우리도 인정하는데 뭐가 문제냐' 라는 결론명제만 내리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장하준의 논리를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주장을 하는 것은 제도학파의 논리이다. 시장을 완전히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장도 사회제도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부를 비롯하여 다양한 다른 사회제도들의 기능도 인정하자는 것이다. 많은 사회제도들이 서로 함께 기능한다는 가정하에 어디서 서로의 경계선을 그어주는 것이 그 사회를 위해 최선인지를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무조건 시장제도만이 최선의 시스템이라고 단언하지 말자는 것이다. 시장을 완전히 부정하자거나 정부개입은 언제나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제도들이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논의과정은 어느 사회에나 필요하다. 시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은 언제나 최선이고 완벽하니까 닥치고 시장시스템만을 따르자. 라는 주장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나는 이 경고메시지를 한번쯤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장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시장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시장의 실패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또 시장 외의 다른 제도들의 실패 또한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논의하고 합의해야 한다.
장하준의 논리를 반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하는 우는 장하준의 논리를 계획경제로 이해한다는 점에 있다. 장하준의 논리는 철저히 제도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시장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정부를 무조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정부든 시장이든 제도에 불과하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 무조건 우월하지도, 무조건 열등하지도 않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드러커 교수가 지적했듯이 모든 사회적 제도란 사회적 합의, 사회구성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성립되고 기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논의를 해야 한다. 어느 한 제도가 무조건 다른 모든 제도보다 더 우월하며 완벽하다고 단언할 것이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장하준이 말하고 싶은 것은, 소위 자유주의 경제정책가(경제학자가 아닌..)들이 말하는 가치판단기준, 정부개입은 무조건 최소화시켜야하고, 물가안정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고, 기업경영은 무조건 주주 부의 극대화라는 기준이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그러한 가정들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논리가 완전히,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의 저자들은 장하준의 논리가 '틀렸다'라고 선언하고 싶어한다. 그 선언을 위해서는 동문서답식 반론, 또는 논점을 비켜나간 반론도 서슴지 않고 있다.
장하준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하준의 논리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무지렁뱅이 경영학도이지만 장하준의 몇몇 논리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장하준의 의문부호들은 되새김질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왜 항상 사람들은 어떤 명제에 대해 틀리다거나 옳다는 정답오답판단을 내려야만 속이 시원한 걸까. 인간사회의 대부분의 명제들은 대체로 정답도 오답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인간에게 완벽은 없다. 단지 보다 나을 수 있을 뿐이다. (Human being can't be perfect. Human being can only be better.) 다만 끊임없는 회의와 비판, 반성적 사고만이 보다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장하준의 책은 충분하고도 넘치는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